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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영성]/한국순교자

1.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1846. 9. 16 군문효수형)

by 세포네 2007.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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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1882년 충청남도 내포 솔뫼(당진)에서 독실한 천주교의 신자인 김제준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는 50세 때 천주교에 입교하였는데 천주교 박해로 여러 차례 검거되어 고초를 겪다가 1718년 옥중에서 순교했다. 이에 김대건의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1839년 기해박해 때 한양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이 같은 순교자의 집안에서 자란 김대건은 1836년(헌종2) 프랑스 신부 모방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뽑혔다. 김대건은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마카오로 가 그곳에 있는 파리 외방 선교회에서 프랑스어, 라틴어, 중국어, 신학, 그리고 철학 등 새로운 학문을 두루 배웠다. 공부를 마친 김대건은 기해박해 이후로 탄압이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로 들어오려고 했으나 두 번이나 실패했다. 1845년 1월 비로소 국경을 넘어 한양에 몰래 들어왔으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매우 거세어서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 해 8월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음으로써 김대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신부가 된 김대건은 프랑스의 페레올, 다블뤼 주교와 함께 상하이를 떠나 충청남도 강경으로 몰래 숨어 들어왔다. 그리고 방방곡곡을 돌면서 비밀리에 전교 활동을 펼쳤다. 김대건은 이듬해 동료 선교사들이 국내로 들어올 수 있는 비밀 입국 통로를 알아보기 위해 백령도 부근은 돌아보다가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김대건은 몇몇 대신들의 부탁으로 옥중에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다. 또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번역하기도 했다. 이후 여섯 차례에 걸쳐 심한 고문을 받다가 효수형을 선고받았다. 김대건은 신부들과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긴 뒤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대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로 천주교에 대한 모진 박해를 무릅쓰고 천주교 교리와 문화를 전파하다가 죽은 순교자이다. 김대건 신부는 1984년 한국 가톨릭 2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에 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우리나라 순교자 102명과 함께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약전> 한국교회의 첫 번째 신부로서 거룩하게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신앙과 활동력으로 빛나는 일생을 보냈고 죽음 또한 빛나고 장렬한 것이었다. 1821년 충청도 솔뫼, 구 교우 집안에서 태어난 김 대건은 어려서부터 비상한 재주와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드러내 나(모방) 신부는 마침내 그를 다른 소년 두 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 때는 1836년, 그의 나이 15세일 때였다. 그는 그곳에서 최 양업 (崔良業, 토마스), 최 방제 (崔方濟, 프란치스코: 수학중 병사) 등 두 소년과 함께 6년간이나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현지에서 발생한 민란 때문에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역을 치르기도 했다. 어쨌든 신학 공부를 하던 그는 기회가 오자 귀국 길에 오르게 되어 우선 요동지방에 와서 대기 중이던 고(페레올) 주교를 모시고 입국을 시도했다.그리하여 그는 1743년 음력 11월, 변문에 이르렀으며, 그곳에서 때마침 북경으로 가던 김 프란치스꼬를 만나 고국의 박해 소식을 듣는다. 그의 말인즉 국내에는 아직 박해 위험이 남아있을 뿐더러 선교사의 거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만큼 그들의 입국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으로라도 입국할 것을 결심하고 혼자서 국경을 넘어 의주까지 잠입했다. 김 대건은 의주에서 하룻밤 묵는 동안 포졸에게 발각되어 하는 수 없이 그들을 피해 요동으로 되돌아왔으며 한편 북경으로 갔던 김 프란치스코는 국경에서 그 이듬해 김 대건과 다시 만나고 주교의 입국 시기를 음력 11월로 잡고 헤어졌다. 그러는 동안 김 대건은 부제품을 받았고 약속 시기에 마중 나온 김프란치스꼬 일행과 같이 서울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국내 사정을 고려하여 고 주교는 동반치 않았다. 김 부제는 서울에 들어오자 수 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진력했고 마침내는 10여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신품을 받아 드디어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으며 그후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고 주교와 안(다블뤼) 신부를 배로 모시고 황해를 건너 조선 땅인 강경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약 2개월 간 휴식 후 곧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기 시작했다. 김신부가 성사를 집전한 곳은 서울과 용인지방이었으며 당시의 교우들 증언에 따르면 김 신부는 활발한 성격에 얼굴은 고아하고 허위대가 좋았다고 한다. 그는 모친과도 상봉하여 얼마간 같이 머무를 수 있었으나 1846년 음력 4월이 되자 주효의 명에 따라 황해도지방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구라파로 보내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하는 길을 새로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이 황해도 지방에의 항해길이 마지막 그의 순교길이 되고 말았다.그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때마침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김 신부의 "양반 배를 어찌 징발할 수 있느냐"는 항의가 도화선이 되어 결국 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김 신부는 그곳에서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문초 끝에 교회 일이 드러나자 마침내 서울 좌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중국 배에서 압수된 주교 편지가 "네 글씨와 다른데, 누구의 것이냐" 라는 문초에 "철필과 새털로 쓴 글씨는 다르기 마련이며 철필이 있으면 이렇게 쓸 수 있다"는 말로 위기를 넘기는 기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그의 넓은 견식과 당당한 태도는 대관들로 하여금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는 말들을 하게끔 했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 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고 말았다. 김 신부의 처형은 9월 16일 새남터에서 모든 것이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이 때 피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1. 성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 본시 김대건 신부님의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고 족보명은 지식(芝植)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7년 정해박해 때 용인 골배마실로 피신할 때까지 이곳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신앙심과 총명함으로 주목을 받았던 김대건 신부님은 선교사로 오신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 신부님으로부터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충남 청양 다락골 출신 최양업 토마(성 최경환 프란치스꼬의 아들)와 충남 홍성 출신 최방제 방지거(최한지의 아들)와 함께 신학공부를 위해 1836년 12월 마카오로 떠났습니다.

1837년 6월부터 1842년 3월까지 유학 6년만에 신학공부를 마치신 김대건 신부님은 서품 받기 전 잠시 귀국의 길에 오릅니다. 수학 도중 함께 했던 최 방지거는 병사하고 김대건 신부님은 부제서품을 받고 조선 입국을 시도 경비가 삼엄한 국경선을 넘느라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고국을 떠난지 8년만인 1845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미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셨고 어머니는 일구월심으로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본인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일시 귀국이라 할 일이 너무 많고 어머니를 만나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러했습니다. 귀국 후 3개월 동안 선교사를 모셔 오기 위해 순교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조선 지도를 작성하며 치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1845년 4월 30일 만주에서 입국의 손길을 기다리는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셔 오기 위해 1백 50냥의 돈으로 한 척의 배를 사가지고 현석문 등 11명의 신자와 함께 그 배를 타고 한 개의 작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중국 상해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11명의 신자 중에는 1명의 목수와 4명의 어부와 배를 타 보지도 못한 6명의 농부가 있었으니 이들은 김대건 신부님을 익숙한 뱃사람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배를 띄운 첫째 날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 잔잔한 파도 위를 달렸으나 다음날부터는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을 밤낮 할 것 없이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배가 뒤집힐 듯 몹시 흔들렸으므로 할 수 없이 김대건 신부님은 끌고 가던 뗏목을 끊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은 두개의 돛대를 베어 버리고 무거운 짐들도 물에 던져 버리게 하였습니다. 뱃사공들은 배멀미에 시달려 넓고 룬은 바다 위에서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배멀미에 몹시 시달렸으나 힘써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이고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내보이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하며 모든 사람을 격려하여 주었습니다. 배는 여전히 사나운 파도 때문에 이리 저리 들까불리다 가장 중요한 키조차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돛을 둘둘 말아서 바다에 던져 키 대신으로 쓰게 하였으나 이것조차 얼마 안가서 끊어졌습니다.

이에 다시 멍석 을 나무토막에 싸매어 키로 써 보았으나 이것마저 파도가 삼켜 버렸습니다.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느님의 도움을 빌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다행히 바람이 자고 비도 멈추어서 모두 이제는 살아났다고 하며 나무 조각을 주워 모아 급한 대로 키와 돛대로 쓰게 하고 바람을 거슬러 항해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보호 아래 김대건 신부님의 대담함과 침착함으로써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조국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하에 서품식을 받은 날이 1845년 8월 17일,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시고 다시 뱃길로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도 폭풍을 만나 제주도 가까이까지 표류하였다가 마침내 184년 10월 12일 강경 나바위에 상륙하여 무사히 서울로 잠입하였습니다. (1845.10.12)

김대건 신부님은 페레올 주교님이나 다블뤼 신부님보다 월등한 위치에서 전교 활동을 펼 수 있었는데 언어나 활동의 제약이 덜했기에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사목활동을 하셨습니다.

세 분의 성직자가 활동하고 계셨지만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와 동료인 최양업 토마의 입국을 위해서 주교님의 편지와 연락문, 해로로 입국할 때 사용할 지도를 가지고 백령도 해역 순위도에 고기잡이 나온 중국 어선에게 전달하고 오시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선 체포되어 해주 감옥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엄중한 문초와 혹독한 고문을 가하는 취조 과정에서 일찍이 천주 성교를 위하여 해외 유학으로 6년간의 마카오 유학 생활, 4년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활동을 통해 얻어진 학식과 견문은 조정의 박해자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선 사학죄인이란 죄목으로 군문효수형의 선고를 받고도 담담하셨고 태도가 의연하였으며, 옥중에서 당신을 교육하고 꾸준히 돌보아 준 마카오 장상 신부님들에게 조선교회의 장래를 부탁하는 서한을 남겼고, 페레올 교구장님에게 조선교회의 모든 일을 당부 드렸으며 어둡고 더러운 옥중에서 형벌로 상처난 아픔을 참아 가며 그가 돌보던 조선 교우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회유문을 남기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골배마실에서 전교활동을 할 때 사제직을 꿈꾸던 이민식(원선시오)은 김대건 신부님의 치명 소식을 듣고 시신을 거두기로 마음먹고 새남터로 달려갔으나 14일간이나 모래밭에 가매장된 시신은 국사범인 관계로 군졸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이민식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시신을 옮기게 됐습니다. 수의에 곱게 싼 머리는 가슴에 안고 동체는 걸방하여 짊어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끊임없이 묵주신공을 바치며 밤을 틈타 시신을 옮기던 이민식은 용인 땅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돌렸다합니다.

은이마을(골배마실)에서 미리내까지는 신덕, 망덕, 애덕이라 불리우는 험한 고개 셋이 있는데 마지막 애덕고개에서 날이새는 바람에 시신을 콩밭에 숨겨놓고 밤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해가 중천에 뜨자 농부들이 가을걷이를 하느라 콩밭으로 오는게 보였고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마음 졸이며 천주님과 성모님께 제발 무사하길 빌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맑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농부들이 돌아가 시신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었으며 10월 26일에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미리내에 있는 그의 선산에 모실 수가 있었습니다.

부모 슬하에서 15년, 해외생활 10년 ,사제생활 1년 1개월(옥중생활 4개월 포함)만에 영광의 순교를 하신 신부님께선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하여 시복되시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2세에 의하여 성인품에 오르셨습니다

2. 유년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6번지)에서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과 어머니 장흥 고씨(울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대건 신부의 아명(兒名)이 재복(再福)이었던 점으로 보아 아마도 형이 하나 있었으나 어려서 죽어 족보에 오르지 못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김 신부의 족보명은 지식(芝植)이고 대건(大建)은 관명(官名)이며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김대건 신부는 정해박해(1827년) 때 용인 골배마실로 피신할 때까지 이곳 솔뫼에서 성장하였다. 김 신부에게는 누이가 하나 있었고 난식(蘭植)이라는 보명을 가진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김 신부의 9대 선조 의직(義直)이 충청도병마절제사(忠淸道兵馬節制使)였고 증조부 진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였던 점으로 미루어 천주교에 입교하여 박해를 받기 전까지는 유복한 가정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1791년 신해박해 때부터 가세가 기울어 1814년 증조부 진후가 죽고나서 김 대건신부 직계는 패가한 것으로 족보상 나타나있다.

1827년 정해박해 때 7살난 김대건 신부는 조부 택현과 부친 제준을 따라 서울울 거쳐 경기도 용인 한덕골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유학을 가기 전 15세까지 그곳에서 조부 밑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3. 유 학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조선 천주교의 사목권을 받은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성직자로 조선에 최초로 입국한 모방신부는 장차 조선 천주교회를 이끌어나갈 방인 사제를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신앙심과 총명함으로 주목을 받았던 김대건은 모방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충남 청양 다락골 출신 최양업 토마(성 최경환 프란치스꼬의 아들)와 충남 홍성 출신 최방제 방지거(최한지의 아들)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모방 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외방전교회 동양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보내기로 했다.

모방 신부는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시키기 전에 반년이상이나 라틴어와 해외유학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적접 교육하였는데 총명이 남다른 세 소년은 훌륭하게 배움을 깨쳤다. 신학 공부를 위해 1836년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 중국으로 귀환하는 유방제(劉方濟) 신부와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신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변문으로 떠났다. 이때 조선인 신자들은 변문에서 새로 입국하는 샤스탕(Chastan. 鄭) 신부를 맞아들여 귀경하였고, 세 신학생들은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남하하여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租借地)로서 서양인들이 극동 진출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며 동양 전교 활동의 거점이었다.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었다.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당시 이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국인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킨 일이 있어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동양 대표부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 교육을 맡았다. 세 신학생들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8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였다. 그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신학생인 최방제가 1838년 11월 27일 열병으로 죽었다.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C?cille)은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하여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몇 년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다.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Maistre, 李)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rigone)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 29일 중국이 영국과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자 조선 출동을 중단하고 마닐라로 회항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하선하여 강남 교구장 주교 베지(B?si)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 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白家店)에 머물면서 3차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小八家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이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Ferr?ol, 高) 신부가 머물고 있었다.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陽關)에서 있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4년 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했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다.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 24세 미만이므로 사제품을 받지 못하였다. 김대건은 1845년 1월 1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4. 활 동

이미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고 어머니는 일구월심으로 아들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건 부제는 본인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교우들에게 부탁하였다. 임시 귀국이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어머니를 만나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러했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데다가 중병까지 앓으면서 귀국후 3개월 동안 그는 신학생을 뽑아 교육하고, 선교사를 모셔 오기 위해 밀입국로를 조사하고 지도를 그리며, 또한 순교자들에 대한 사적 자료를 수집하였다.

마침내 1845년 4월 30일 만주에서 입국의 손길을 기다리는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를 모셔 오기 위해 1백 50냥의 돈으로 한 척의 배를 사가지고 현석문 등 11명의 신자와 함께 그 배를 타고 한 개의 작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중국 상해를 향하여 떠났다. 11명의 신자 중에는 1명의 목수와 4명의 어부와 배를 타 보지도 않은 6명의 농부가 있었다. 이들은 김대건 부제를 익숙한 뱃사람으로 믿고 있었다. 배를 띄운 첫째 날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 잔잔한 파도 위를 달렸으나 다음날부터는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을 밤낮 할 것 없이 시달리게 되었다. 배가 뒤집힐 듯 몹시 흔들렸으므로 할 수 없이 김대건 부제는 끌고 가던 뗏목을 끊어 버렸다. 그 다음은 두개의 돛대를 베어 버리고 무거운 짐들도 물에 던져 버리게 하였다. 뱃사공들은 배멀미에 시달려 넓고 바다 위에서 방향조차 잡을 수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지경이었다. 김대건 부제도 배멀미에 몹시 시달렸으나 힘써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이고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내보이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하며 모든 사람을 격려하였다. 배는 여전히 사나운 파도 때문에 이리 저리 들까불리다 가장 중요한 키조차 부러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돛을 둘둘 말아서 키 대신으로 쓰게 하였으나 이것조차 얼마 안가서 부러져나갔다. 이에 다시 멍석 을 나무토막에 싸매어 키로 써 보았으나 이것마저 바람에 날아가버렸다.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과 성모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하느님의 도움을 빌다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다행히 바람이 자고 비도 멈추어서 모두 이제는 살아났다고 하며 나무 조각을 주워 모아 급한 대로 키와 돛대로 쓰게 하고 바람을 거슬러 항해를 계속하였다. 이리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보호 아래 김대건 신부의 대담함과 침착함으로써 6월 4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조국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하에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金家港)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날이 1845년 8월 17일,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8월 30일 상해를 출발하여 다시 뱃길로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도 폭풍을 만나 제주도 가까이까지 표류하였다가 40여일 만인 1845년 10월 12일 마침내 강경 황산포 나바위에 상륙하여 무사히 서울로 잠입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님이나 다블뤼 신부보다 월등한 위치에서 전교 활동을 펼 수 있었는데, 언어나 활동의 제약이 덜했기에 입국하던 해 11월과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공소의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사목활동을 하였다. 경기도 용인 산속 은이 공소에는 그의 동생 난식과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이상 두 달이 김대건 신부가 조선에서 한 사목방문 활동의 전부다. 그의 교회활동은 선교사의 입국통로를 개척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서 끝났다. 그의 말년의 직책은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었다.

5. 순교와 장례식

1845년부터 1946년 중반까지 페레올 주교, 안다불뤼 신부, 김대건 신부 등 세 분의 성직자가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846년(헌종12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주교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와 동료인 최양업 토마의 입국을 위해서 주교님의 편지와 입국할 사용한 해상지도를 가지고 백령도 해역 순위도로 갔다. 고기잡이 나온 중국 어선에게 편지와 지도를 전달하고 돌아 오다가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지 10일이 되던 날 김대건 신부는 해주 감옥을 거쳐 6월 21일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를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의 문초를 받는 취조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일찍이 조선 천주교회를 위하여 6년간의 마카오 유학과 4년간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수학과 활동을 통해 얻은 김대건 신부의 신학문에 대한 조예와 서양어(라틴어, 불어)는 물론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사실 김 신부는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처음 서양 학문을 정식으로 공부하였고 여러 나라의 외국어를 구사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옥중에서 당신을 교육하고 꾸준히 돌보아 준 마카오 장상 신부들에게 조선교회의 장래를 부탁하는 서한을 남겼고, 페레올 교구장님에게 조선교회의 모든 일을 당부 드렸으며 어둡고 더러운 옥중에서 형벌로 상처난 아픔을 참아 가며 그가 돌보던 조선 교우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회유문을 남겼다.

"사학죄인(邪學罪人) 김대건응 효수(梟首)토록 하라." 헌종실록 제13권은 김대건 신부에 대한 1846년 7월25일의 최종판결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리고 사형집행을 미루다가 그해 9월 15일 헌종은 집행명령을 내려 다음날 9우러 16일 서울 한강 백사장인 새남터에서 집행되었다. 12명의 회자수가 내리치는 칼날 중에 8번째에 가서야 목이 떨어졌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 직후 새남터 모래톱에 매장되었다. 순교한지 40여일 지난 10월 26일에 8명의 신자들이 상여를 이용하여 김 신부님의 시신을 운구하여 미리내(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정식으로 매장하였다.

현재 김 신부의 유해는 여러 곳에 분산 봉안되어 있으며, 솔뫼 성지에도 김 신부의 유해 일부와 조선교구 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모방 신부?샤스땅 신부 등의 머리칼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6. 성 김대건 신부의 諡福 · 諡聖

1821년 8월 21일 솔뫼에서 태어나 부모 슬하에서 15년, 1836년부터 해외생활 10년 ,1945년부터 사제생활 1년 1개월(옥중생활 4개월 포함)만에 영원한 진리를 위해 순교를 하신 김대건 신부는 1859년 9월 24일 비오 9세 교황에 의하여 기해(己亥) 및 병오(丙午) 박해 순교자 81위(位)와 함께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1925년 7월 5일에는 비오 11세 교황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성인품에 올랐다.

7. 성 김대건 신부의 靈性

영성이란 영적 생활, 인간의 내면 생활, 정신적인 생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높은 것, 즉 하느님이신 성령의 영(靈)과 함께하는 삶을 말한다. 하느님의 힘, 즉 하느님의 영 힘입어 그리스도의 생명을 현세에서 사는 것을 영성이라 한다. 따라서 세례받은 후 그 성령의 지도를 원칙으로 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사는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영성은 감옥에서 교우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와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요약되어 있다.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 무시지시(無始之時)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 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慰藉)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하느님)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 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領洗)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效驗)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 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아니 남만 어찌 같으리요."(마지막 서한에서)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 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순교 직전 최후 증언)

여기에서 김대건 신부의 영성의 제일 요소는 변함없는 진리, 죽더라도 영원히 남는 진리, 즉 인간의 존재 근거인 하느님을 만나 그분을 숭배하고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어 마침내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죽지 않고 고통이 없는 생명에 들어가는 구원을 위하여 이 조선이라는 땅에 그 진리와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이다. 자신이 믿고 전하는 진리가 거짓이라면 죽은 뒤에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것이고 참되다면 감히 죽의 힘으로도 누르지 못하기에 번성할 것이라는 그의 신념이 그를 순교하게하였떤 것이다.

과연 그의 신념은 옳았다. 진리는 박해를 받지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과 진리는 당시대 다른 신념을 가진 다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순교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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