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이 말씀을 토마스 사도에게만 하신 말씀이고
나에게 하신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대로 된 양심과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나에게도 하신 말씀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게도 의심을 버리라고 하시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버리기 위해서 먼저 나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의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니 인간은 의심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나나 토마스 뿐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의심한다는 것을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의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의심해야 한다고 할 때 의심을 그 자체로 좋게 보거나 궁극적인 거로 보는 것은 아니며 인간에 대한 의심을 말하는 것도 아니지요. 사실 우리가 큰 사람이라면 그리고 해야 할 의심을 하는 사람이라면 쩨쩨하게 사람을 의심치 않고 담대하게 하느님을 의심해야 합니다. 의심을 한다면 하느님을 의심하지 인간을 의심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믿어줄 줄 모르는 사람은 사실 소인배입니다. 믿음의 그릇이 작기 때문인데 그것은 큰 사람이란 인간을 실수를 안 할 사람이 아니라 할 수도 있는 존재라고, 거짓말을 안 할 사람이 아니라 하기도 하는 존재라고 통 크게 받아들이는데 비해 소인배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해서는 이렇게 통 크게 믿어주지만 하느님에 대해서는 믿어도 되는지 의심을 크게 해야 합니다. 왜냐면 인간은 믿어줘도 큰 손해 볼 것 없지만 하느님은 잘못 믿으면 전 인생이 잘못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에게 자기 전부를 건다면 그 때문에 인간을 의심하겠지만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 전부를 걸기 때문에 의심을 하느님께 하는 겁니다. 결국 인간이 하느님을 의심하는 것은, 그것도 크게 의심하는 것은 하느님께 자기 전부를 걸려고 하기 때문인 겁니다. 내 돈 전부를 투자하려는 사람은 내 돈 전부를 맡겨도 되는지 은행을 꼼꼼하게 확인하는데 이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이 의심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본래 꼼꼼하게 확인하고 검증했던 분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시며 너희는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자
다른 제자들은 그 길을 몰라도 잠자코 있는데 토
마스 사도가 나서서 그 길을 모른다고 대변하지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에 앞서 라자로가 죽었을 때 주님께서 라자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하시자 다른 제자들은 라자로의 잠을 깨우러 가는 줄 대충 생각했지만 토마스만은 죽은 라자로에게 가는 것으로 정확히 알아듣고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이 말이 좀 엉뚱한 말처럼 들리지만 토마스는 주님을 따르는 것을 죽음을 걸고 따라 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분이고 그래서 그렇게 따라갔는데 주님이 콱 죽어버리시니 그 믿음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 너무도 커 제자들 공동체를 떠나 8일이나 있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고 그때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다른 제자들이 얘기하자 자기 눈과 손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확고하게 믿기 위해서 꼼꼼하게 확인하는 작업이 의심입니다. 믿기 위해서 의심하고, 토마스 사도처럼 더 확고하게 믿기 위해서 더 크게 의심하는 우리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