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다시피 빵의 기적은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몇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군중을 먹일 걱정을 먼저 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먼저 걱정을 하시고, 공관복음에서는 제자들보고 먹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그 말씀을 않고 다만 필립보를 시험하시고, 공관복음에서는 오병이어가 제자들에게 있는 것으로 얘기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오병이어를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얘기합니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양식, 이것을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과 달리 강조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가진 것으로 나와 있지만 어린아이만 먹을 것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상식적으로 볼 때 당연히 아이 말고 어른들도 가지고 있었고, 어른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었겠지요. 그럼에도 요한복음이 어린아이의 얼마 안 되는 양식을 강조한 것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때 어린나귀를 쓰신 것과 같은 뜻이겠지요. 그리고 골리앗을 어린 다윗이 대적하고 무기가 아닌 무릿매를 가지고 대적한 것과 같은 뜻일 겁니다. 우리 인간은 어린이를 쓸모없이 여기고, 작은 것을 무시합니다. 힘 있고 큰 것을 유용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안드레아는 이런 인간의 마음을 대표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요한복음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얘기하고 싶고 강조하고 싶어서 공관복음과 달리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말씀도 뺀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뭘 하실 때 인간이 가진 무엇이나 인간이 이뤄놓은 것을 가지고 하시지 않고 인간의 것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하시거나 작은 것을 가지고 하십니다. 인간은 작거나 적어서 소용이 없다고 버려 버리는데 하느님은 그 작은 것과 적은 것을 소용없다 않으시고 오히려 소중하다 하십니다. 음식솜씨가 좋은 사람은 지시래기나 아무 재료를 가지고도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고 맛있게 만들며, 솜씨가 좋은 사람은 버리는 것을 가지고 유용한 것을 만들 듯 능력의 하느님은 인간이 소용없다고 버리는 것을 가지고도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능력이 없어 하고 싶어도 못하기도 하고, 사랑이 없어 할 원의와 의지도 없는 경우가 많지만 하느님은 사랑과 능력이 충분하시기에 좋은 것이면 뭐든지 하기를 원하시고 뭐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해야 하고 이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에 힘입어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주님처럼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뒤집어 얘기하면 우리가 기적을 일으키지 못함은 하느님이 원치 않으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고,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능력을 힘입을 수 있도록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진 작은 것, 우리의 오병이어를 안드레아 사도처럼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작은 힘과 작은 사랑은 어린아이의 오병이어처럼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모셔오는 마중물이기 때문입니다. 저희의 작은 사랑을 소용없다 않으시고 소중하다 하시는 주님, 저희의 작은 힘과 작은 사랑을 당신 큰 사랑과 능력의 마중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